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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늘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나라는 사

                     람의 정체성에 커리어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내 재능과 능력에 대한 불신은 무엇보다 큰 위기로 다가왔다. 하지

                     만 나는 내 안에서 열심히 싸웠고, 내 힘으로 이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월의 그날 밤, 엄마는 이것이 나 혼자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병이

                     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엄마를 통해 이 마음의 병이 어쩌면 우
                     리 가족에게 내려오는 유전일지도 모른다고 처음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는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 삼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얼마

                     나 힘들었는지 말해주었다. 우리가 학교에 가면 진이 다 빠져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다가, 학교가 끝나 우리가 돌아올 쯤에 어떻게
                     억지로 몸을 일으켜 꾸역꾸역 남은 하루를 살았다고 했다.

                       할머니도 그랬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마흔 살에 돌아가시고 일
                     찍 홀로 된 할머니는 다섯 아이를 키우며 늘 금욕적이고 엄격한 삶

                     을 살았고, 아이들과 함께 웃거나 따뜻하게 아이들을 안아주는 일
                     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잠을 잘 때 가슴 위

                     로 양팔을 교차한 자세로 누웠는데, 이유는 자신이 잠을 자다 죽으

                     면 가족들이 시체를 쉽게 옮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날 밤, 엄마는 내 마음의 병은 나 혼자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겪는 것을 보았고 엄마도 경험
                     했기 때문에 분명히 아는 사실이라고 했다. “이건 분명히 우울증이

                     야.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꼭 만나야 해. 그렇게 하겠다고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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