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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살아 있는 흔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한 연대기적 기록은 없으면서도 외상에
따른 감정과 신체 기억이 느닷없이 활성화되어 취약해진 사람에게
는 기억이라고 볼 수 없는 증상과 반응의 흔적만 남는다. 트라우마
생존자들은 치료받으러 오면 불안, 우울, 수치심, 낮은 자존감, 외로
움과 소외, 분노, 충동성, 행동화 얘기만 한다. 이들은 만성적으로 위
험을 예상하느라 힘들어할 수 있는데, 이는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두
려움과 공포, 과경계(‘뒤통수에도 눈이 달려 있다’), 만성 수치심과
자기혐오,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 무망과 무력감, 유기
공포, 감정의 마비와 단절로 나타날 수 있다. 또는 중독, 자해 충동,
섭식장애, 죽음을 바라거나 ‘지는 싸움’을 계속하는 와중에 마지막
수단으로 치료를 받으러 올 수도 있다. 이들은 대체 무엇이 큰 위험
을 무릅쓰는 대가로 잠깐의 위안을 얻으려는 자기파괴적 충동을 유
발하는지 거의 말하지 못한다. “저를 혼내주려는 거예요.” “저 자신
이 싫어요.” “저는 살 가치가 없어요.” “제가 역겨워요. 제가 죽었으
면 좋겠어요.” 이들은 이런 패턴과 과거를 연결하기를 어려워하며,
더 흔하게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지 않으려 하거나 축
소하려 한다.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요.”
트라우마 치료의 초기 역사에서 치료자들은 외상사건에 대한 명
확성이 떨어지는 트라우마 내담자의 강한 정서적 반작용을 다루기
위해 프로이트 시대부터 현재까지 심리치료에서 가장 흔하게 받아
들여지는 치료법인 ‘대화치료’에 의지했다. 대개는 내담자가 연대
기적 사건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할 수 있을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계속 떠올리도록 권장했다. 그런데 이 접근법을 사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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