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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걸렸다. 수많은 핑곗거리를 생각해내며 확인하기를

                 미뤘던 탓이다. CD 데이터를 컴퓨터에 다운로드하는 과정이

                 너무 복잡할 것 같아서, 해외 강연이 많아서, 워크숍을 앞두고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손주들과 시간을 보내야 해서 등…….
                 돌이켜보면 단지 스캔 결과를 확인하는 게 걱정스러웠던 것

                 이다. 그 두려움을 간신히 억누르고 이성을 되살린 다음에야

                 파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일을 다운로드하는 데는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환자

                 의 스캔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컴퓨터 모니터에 뜬 이미지들
                 을 한 장 한 장씩, 뇌간부터 대뇌반구까지 찬찬히 살펴보면서

                 크나큰 무력감과 절망감에 휩싸였다. 곧 자신의 장례식을 예

                 감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흑백 이미지를 통해 노화

                 하고 있는 나의 뇌가 드러났다. 죽음과 파멸의 전조가 보였고

                 그중 어느 정도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70년 된 나의 뇌는 쇠
                 약해져 쪼그라들었고 닳아 있었다. 젊은 시절의 뇌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백질에는 불길한 흰색 반점도 있었다. 백질

                 과집중white-matter hyperintensities이라고 알려진 허혈성 손상의

                 징후였다. 꼭 불길한 두창(수포, 농포성의 피부 질환이 특징인 급

                 성 질병-옮긴이)처럼 생겼다. 한 마디로 내 뇌는 부식되고 있었

                 다. 내가 부식되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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