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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절 애상


                        현대시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1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문인과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는 독자들은 가끔 이런 가정
           을 한다. “만약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멋진 글이 세상에 나왔을까!” 이런 탄성은
           어느 분야든 최고 수준에 도달한 사람에 대해서만 느껴지는 감정이다.
             그는 대중가수로 치면 김현식, 유재하, 김광석 정도의 의미를 가진 사람이었다. 영화나
           건축 혹은 경제를 비롯한 한국의 거의 모든 분야의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이 그를 좋아하거
           나 여전히 그의 시를 읽고 있다는 증거는 여기저기에서 드러난다. 〈봄날은 간다〉, 〈질투는
           나의 힘〉이 영화의 제목으로 쓰인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시가 수천 갈래로 분화
           되어 여기저기에서 창조의 재료로 쓰이는 것이다. 지워지지 않는 족적을 남긴 모든 창조자
           가 그렇듯 그의 삶과 시는 서로 닮았다.
             1989년 3월 7일, 그는 서울 종로 파고다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만 스물아홉 생일
           을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급성뇌졸중’이라는 사후 진단이 내려졌다. 마치 제임스 딘의 죽
           음처럼, 이 모든 것이 그가 남긴 시처럼 쓸쓸하고 고독하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빈집〉
           을 읽어보면, 그가 남긴 시가 4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읽히는 현상과 현대시의 표본으로
           사랑 받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중략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짧은 시에서도 일상에서 느끼는 현대인의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그런
           걸까? 그가 남긴 유일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지금까지 50만 부 이상이나 판매되며
           시집으로는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1985년 1월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시 부문에서 〈안개〉로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불과 4년 2개월 후 세상을 떠났
           는데, 당시에는 원고가 출판사로 넘어가지는 않은 단계라 아직 시집을 발간하지 않은 상태
           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시집은 그가 죽은 지 두 달 만에 다른 사람의 손길을 거쳐
           유고집 형태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아직 시집 한 권 내지 않았던, 이제는 하늘로 떠난 그
           의 시를 수많은 독자가 불러내 이루어진 기적이다. 그의 30주기(周忌)가 되는 2019년에는
           그를 사랑하는 젊은 시인들의 헌정 시집 《어느 푸른 저녁》까지 나와서 한국 최초이자 마지
           막으로 시집 한 권을, 그것도 사후에 세상에 내놓고 자신을 기리는 헌정 시집까지 갖는 인
           물이 되었다.
             시를 위해서 태어났고, 그가 있어서 시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성적도 매우 좋았던 그
           가 서울대를 가지 않고 연세대에 진학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윤동주의 시처럼 오랫동안
           사람들이 사랑할 좋은 시를 쓰자’. 그는 자신이 그 멋진 꿈을 이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기형도(奇亨度)다.                                                    1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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