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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탕평책이라고 해. ‘탕평’은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공평하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영조의 탕평책은 붕당의 어느 편도 들지 않
고 공평하게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뜻이었지.
영조는 이러한 마음을 담아 탕평비를 세우기도 했어. “남과 두루 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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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 편당 을 가르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요, 편당만 짓고 두루 친하지
못하는 것은 소인배의 사사로운 마음이다.”라고 새겨서.
이렇게 탕평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음……. 성공했다
고 보기는 어려워. 영조는 자신이 왕이 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노론을
완전히 외면하지 못했고, 자신에게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소론을
제대로 끌어안지도 못했거든.
그래서 사도 세자의 비극도 생겨났지.
사도 세자는 영조가 마흔두 살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어. 영조는 태어난
지 14개월밖에 안 된 아기를 세자로 책봉할 만큼 기뻐했어. 또 열다섯 살
부터는 왕의 업무를 대신 시키기도 했을 정도로 믿음직스러워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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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사도 세자는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 에
갇히고 말아. 그리고 그 속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 도대체 그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사도 세자가 정신병에 걸려 점점 포악해졌고, 심지어 반역을 일으키려
편당 한 편의 당파
뒤주 쌀 등의 곡식을 담아 두는 궤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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