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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사람의 삶으로 본다면 영조는 불행했던 것 같아. 자신에게

                 열등감을 심어 줬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늘 안쓰러웠던 어머니, 치열한 권

                 력 다툼 끝에 세상을 떠난 형, 자신의 손에 목숨을 빼앗긴 아들, 모두 영조

                 에게는 상처였고 아픔이었거든.

                           그럼에도 백성들에게는 좋은 왕이었어. 큰 죄를 지은 사형수라

                 도 반드시 재판을 세 번 거치게 하여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했고, 가


                 혹한 형벌을 없앴으며, 노비가 상민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었지. 서얼, 그러

                 니까 본부인이 아닌 첩의 자손들이 관리가 될 수 있는 길도 열어 주었고.

                    또 균역법을 실시해 백성들의 세금도 줄여 주려고 했어. 균역법이 무엇

                 인지는 옆에서 자세히 살펴볼 텐데, 간단히 말하면, 군대에 가는 대신에

                 나라에 바치던 베 옷감 두 필을 한 필씩만 내도록 한 거야.

                    영조의 노력 덕분에 백성들은 한결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어. 이


                 러한 안정된 사회 분위기는 영조의 손자 정조 대에 조선의 문화가 더욱 발

                 전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












                  1694년           1724년          1725년          1750년          1776년

                  숙종의 아들로         영조가 조선 제21대    영조가 붕당의 대립을    균역법을 실시해       영조가 세상을
                  태어났다.           임금이 되었다.       막기 위해 탕평책을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떠났다.
                                                 펼쳤다.           줄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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