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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의 사회 동요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03 호족의 성장                                            05 서경 천도 운동





                    신라는 8세기 후반에 이르러 중앙 진골 귀족 간의 왕위 쟁탈전                  이자겸의 난
                   이 치열해지면서 무열왕 직계의 혜공왕이 피살된 이후 155년                    11~12세기 일부 문벌 귀족 가문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권력을
                    간 20명의 왕이 교체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왕위 다툼과 잦                  둘러싼 문벌 귀족 간의 갈등이 일어났다. 유력한 문벌 귀족인

                    은 왕위 교체로 왕권이 약화되면서 집사부 시중의 권한은 약화                   경원 이씨 가문의 이자겸은 왕실과의 중첩된 혼인을 통해 금의
                    되고 귀족 대표인 상대등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지방에서는 웅                   사대 요구를 수용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천주 도독 김헌창이 자신의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이에 인종이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자,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난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해상 무역으로 성장한 장보고도 왕                 을 일으켰다(1126). 이자겸은 궁궐을 불태우고 인종을 감금하
                    위 쟁탈전에 가담하였다.                                       였으나, 인종이 척준경을 회유하여 이자겸을 몰아낸 후 척준경
                    중앙의 왕위 다툼으로 지방 통제력이 약화된 가운데 잇따른 자                   마저 탄핵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고 문벌 귀족 사회는
                   연재해와 지배층의 사치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지방민에                      급격히 동요하였다.

                    대한 강압적 수취가 이어졌다. 이에 지방민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나 초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진성 여왕 때에는 원종·애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노의 난과 같은 농민 봉기가 자주 발생하였다.
                    중앙의 지방 통제력이 상실되어 가자 독자적인 지방 세력으로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호족이 성장하였다. 호족은 그들의 근거지에 성을 쌓고 사병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묘청, 정지상 등 개혁적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장군이라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성향의 서경파와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개경파가 대
                    군사권을 장악하였고, 지방에서 성장하던 새로운 불교 종파인                    립하였다.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우며 서경 천도, 칭제 건원, 금국
                    선종을 이념적 지주로 삼았다. 또 금성 중심의 지리 개념에서                   정벌 등을 주장하였다.
                    벗어나 다른 지방의 중요성을 강조한 풍수지리설을 환영하였다.                   서경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묘청 등은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며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 김부식
                                                                        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04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 통일


                                                                           06       고려의 대외 관계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한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우며 고려
                    를 건국하고(918), 송악(개경)을 도읍으로 삼았다. 왕건은 호
                    족 세력을 통합하며 후백제와 경쟁하였고, 고창(안동) 전투(930)               거란과의 관계
                    에서 후백제에 승리하여 우세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한편, 후백                  고려는 송과는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발해 멸망 등을 이
                    제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아들                    유로 북방의 거란(요)은 배척하였다. 이에 거란은 1차로 소손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감금되었다. 이후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                   녕을 보내 고려를 침략(993)하였는데 서희가 소손녕과의 외교 담
                    하여 고려에 투항하였다.                                       판을 통해 오히려 강동 6주를 획득하여 고려의 영토에 편입시켰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도 후백제의 잇단 침략 등으로 나라                   다. 이후 거란은 강조 정변을 구실로 2차 침입을 하였으나 양

                    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려에 항복하였다(935). 이후 고               규 등의 활약으로 격퇴하였고, 3차 침입 때에는 강감찬이 이끄는
                    려는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일리천 전투(936)에서 격파하고 후삼              고려군이 귀주에서 소배압의 거란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귀주대첩,
                    국을 통일하였다(936).                                      1019). 연이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후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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