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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백제의 부흥 운동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                            백제 멸망 이후 각지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복신과 도침 등
                   01 삼국 통일
                                                                     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여 주류성에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고, 흑치상지는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
                                                                      켰다. 당시 왜는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백강(금강)입구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                                         에서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였다(백강 전투,

                 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가 주변으로 세력을 확대하자 위협을                    663). 이후 백제 부흥군은 지도층의 분열과 나·당 연합군의
                 느낀 고구려는 요서 지방을 먼저 공격하였다. 이에 수의 문제                   공격으로 좌절되었다.
                 가 고구려를 쳐들어왔으나 큰 성과 없이 물러났다. 그 뒤에 수                  고구려의 부흥 운동은 검모잠, 고연무 등이 중심이 되어 전개
                 양제가 113만 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살수(청천               되었다. 검모잠이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구
                 강)에서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에 크게 패하였다(살수대첩, 612).             려 유민을 모아 한성(황해도 재령)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켰고, 고연
                 수가 멸망한 이후 당이 중국을 통일하자 고구려는 당의 침입에 대비하                무도 오골성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여 국경에 천리 장성을 축조하였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천리 장
                 성 축조를 감독하며 세력을 키운 후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
                 악하였다(642). 연개소문은 신라와 당에 강경하게 대응하였고,
                 이에 당의 태종은 연개소문의 정변 등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
                                                                        02       발해의 건국과 발전
                 입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안시성에서 당을 물리쳤다(안시성 전투,
                 645).



                 삼국 통일 과정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출신 대조영(고왕)은 고구려인과 말
                 고구려가 수·당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사이,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갈인을 이끌고 만주의 동모산(지린 성 둔화 시)에서 발해를 건
                 공격하여 대야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위기를 느낀 신라
                                                                     국하였다(698).
                 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고구려
                                                                      발해 2대 왕인 무왕은 연호를 인안으로 정하고 발해와 대립하던
                 가 죽령 이북 지역인 한강 유역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여 성사
                                                                      흑수 말갈을 토벌하는 한편, 장문휴를 보내 당의 산둥 지방(등주)을
                 되지 못했다. 고구려의 도움을 얻는 데 실패한 김춘추는 당에 건너가
                                                                      공격하며 당에 대항하였다. 또 일본과의 친선 관계를 통해 국
                 동맹을 제의하여 나·당 연합이 결성되었다(648).
                                                                      제적인 고립을 피하려고 하였다.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다. 당의 장수 소정방이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왕은 연호를 대흥으로 정하고 당과
                 당군을, 김유신이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계백이
                                                                     친선 관계를 수립하여 당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3성
                 이끄는 백제군은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을 맞아
                                                                      6부의 중앙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신라와의 상설 교통로인
                 결사 항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어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되
                                                                     신라도를 개설하였다.
                 면서 백제는 멸망하였다(660).
                                                                      9세기 초 선왕 때 발해는 요동 지역까지 진출하여 발해 역사
                 백제 멸망 이후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
                                                                     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5경 15부 62주의 행정 구역을 정
                 는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이를 막아냈으나, 연개소문이 죽은 후
                                                                      비하였다. 또 건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 무렵 중국
                 후계자 문제로 권력 다툼이 발생하여 국론이 분열되었다. 나·
                                                                     인들이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불렀을 정도로 그 세력이 대단하
                 당 연합군이 이를 틈타 평양성을 함락시킴으로써 고구려는 멸
                                                                     였다.
                 망하였다(668). 당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백제의 옛
                                                                     그러나 10세기 초 지배층의 권력 다툼으로 국력이 쇠퇴하였고,
                 땅에 웅진 도독부를,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
                                                                      거란이 세운 요의 침입으로 결국 멸망하였다(926).
                 고, 신라에도 계림 도독부를 두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
                 민과 연합하여 당에 맞섰다. 신라는 금마저(익산)에 안승을 왕으로
                 하는 보덕국을 세워 고구려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고 매소성, 기벌포 등
                 에서 당을 격퇴하여 삼국 통일을 달성하였다(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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