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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왈드는 그간 해온 경제 통계 연구로 국제적인 주목을 얻고 있

               었다. 덕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되기 한 해 전인 1937년 여름
               에 미국 콜로라도스프링스의 한 경제 연구소로부터 초빙을 받았다.

               왈드는 인정받아 기쁘면서도 처음에는 떠나길 주저했다. 하지만 합

               병 소식에 마음을 바꿨다.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이 마구잡이로 살
               해되고, 도둑맞고, 밀고당하는 상황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유대인 가

               게들은 약탈을 당했고, 가정은 유린됐으며, 공공 분야에서 유대인의

               활동은 뉘른베르크법(독일에 사는 유대인의 독일 국적을 박탈하고 유대인과
               독일인의 성관계와 결혼을 금지하는 한편, 유대인이 공무를 담당할 수 있는 권리

               를 박탈한 나치의 법: 옮긴이) 때문에 금지됐다. 따라서 오스트리아경기순
               환연구소에서 왈드의 활동도 금지당했다. 왈드는 제2의 고향인 빈에

               작별을 고하기가 못내 아쉬웠지만, 광기의 바람은 날이 갈수록 거세

               졌다.
                 1938년 여름, 왈드는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었다. 유대인이 오

               스트리아를 탈출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경비병들을 따돌리고 루마

               니아로 잠입한 뒤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마도 그때 결단을 내리지
               못했으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왈드의 가족, 즉 부모와 조

               부모 그리고 다섯 형제자매는 전부 유럽에 남았는데, 형제인 헤르만
               만 빼고 나머지는 전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됐다. 미국에 정착한

               왈드는 안전했고, 열심히 일했으며, 결혼해서 두 아이를 두었다. 그리

               고 미국에서 맞이하는 새로운 삶에서 기쁨과 위안을 찾았다. 하지만
               가족의 참담한 운명 앞에서 깊은 슬픔에 빠지곤 했는데, 그 때문인지

               다시는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않았다.






               28|수학의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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