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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중국 통일이라는 큰 뜻 아래 힘을 하나로 합쳐 북벌전쟁을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국민당의 세력이 공산당에 비해 월등히 높았으므로 공산당의
                   핵심 간부들은 공산당 소속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했다. 마

                   오쩌둥도 국공합작을 위해 후보위원으로 국민당에 입당하였고, 장제스(장개석)
                   는 북벌을 추진하기 위한 군사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쑨원과 달리

                     공산당 소탕에 치중한 극우파 장제스



                     북벌을 준비하던 쑨원이 1925년에 암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후계
                   자였던 장제스가 쑨원의 유지를 이어받아 북벌전쟁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

                   나 장제스는 쑨원과 달리 공산당과의 합작을 달가워하지 않는 극우파였다.
                   장제스는 국공합작으로 북벌전쟁을 전개하면서 공산당을 배척할 명분을 만

                   들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
                     장제스는 공산당원이 함장으로 있던 중산함에 회항을 명령해놓고 함장이

                   마음대로 군함을 회항했다고 모함해 공산당 세력을 축출하려 했다. 하지만
                   국민당 주석이었던 왕자오밍(왕조명)이 장제스의 조작 사건에 반발하여 국민당

                   을 떠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공산당을 축출하지 못한 아쉬운 결과였지
                   만, 장제스는 이 사건으로 국민당의 최고 실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국공연합군은 1926년부터 진행된 북벌전쟁으로 양쯔강 이남을 평정하고
                   1927년에 상하이에 입성했다. 자본민주주의인 국민당이 공산당과 합작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상하이의 상공인과 부유층 세력이 장제스에게 국민당의
                   정체성을 언급하자 장제스는 국민당의 정체성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19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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