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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계기로 청나라는 외세 침입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군사
력을 강화했다. 하지만 청나라의 허점은 금세 드러났다. 1894년에 조선의 지
배를 두고 일본과 청일전쟁을 벌였는데, 작은 섬나라라고 얕보았던 일본에게
도 패배한 것이다. 청나라는 청일전쟁의 대가로 조선은 물론 대만까지 빼앗
기게 되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엿보고 1900년에 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프
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로 구성된 8강 연합군이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
을 점령하고 외국 군대의 베이징 주둔을 허용하는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다.
청나라는 사실상 주권을 상실하고 꼭두각시처럼 꼼짝없이 서구 열강들에 의
해 좌지우지되는 형국이 되었다.
청나라가 외세에 의해 반식민지 상태가 되자 사회 여러 계층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의 통일과 주권을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쑨원(손문)도 그
런 인물 중 하나였다. 쑨원은 삼민주의(三民主义)를 내세웠다. 삼민이란 민족주
의적 한족 국가를 세우겠다는 민족(民族), 인민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의 민권(民權), 인민들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경제정책의 민생(民生)을 말
한다. 쑨원은 삼민주의로 다시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중국
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를 결성하여 민주공화국 수립을 위한 혁명운동을 시
작했다. 국민들도 청나라 정부의 부패와 무력함을 비판하고 쑨원의 혁명에
가담하면서 혁명운동은 중국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중국혁명동맹회의 혁명운동은 점점 청나라 정부를 압박했다. 청나라 정부
는 궁지에 몰리자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모든 권력을 넘겨주고 혁명군을 타
파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던 위안스카이는 중
국혁명동맹회에 의해 새로 건설될 중화민국의 대총통(大總統) 자리를 넘겨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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