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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 :  흥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41회 31번   (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병인박해(1866년)
                             (가)  지난 달 조선에서 국왕의 명령에 의해, 선교 중이던 프랑스인 주교 2명과 선교
                                                                               병인박해 때 프랑스 선교
                               사 9명, 조선인 사제 7명과 무수히 많은 남녀노소 천주교도들이 학살되었습니      사가 순교하면서 병인양요
                               다. …… 며칠 내로 우리 군대가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출발할 것입니다. ……     (1866)가 발발하였으며 이후
                               이제 우리는 중국 정부의 조선 왕국에 대한 어떤 영향력도 인정하지 않을 것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
                               을 선언합니다.        - 「베이징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의 서한」 -   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척화비 건립(1871년)                                                    도굴(1868)하는 사건이 발생
                             (나)  이때에 이르러서는 돌을 캐어 종로에 비석을 세웠다. 그 비면에 글을 써서 이르
                                                                               하였습니다. 한편 제너럴셔
                               기를,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즉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    먼호 사건이 원인이 된 신미
                               장함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다.”라고 하였다.         - 『대한계년사』 -   양요(1871)를 겪은 후 대원
                                                                               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오페르트 도굴 사건, 1868년                         통상 수교 거부의 의지를 보
                                ①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하였다.                       여주었습니다.
                  운요호 사건, 1875년
                                ② 일본 군함 운요호가 영종도를 공격하였다.
                                                                           거문도 점령, 1885년~1887년
                                ③ 영국군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하였다.
                조·불 수호 통상 조약
                      체결, 1886년  ④ 조선이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고 천주교 포교를 허용하였다.
                                ⑤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하여 이만손 등이 영남 만인소를 올렸다.            영남 만인소 사건, 1881년



                접근 방법  흥선 대원군은 서양 세력이 통상을 요구해 오자 외세가 경제적 교류를 내세워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한
                      다고 보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시행하였어요. 특히 러시아의 통상 요구를 천주교 선교사를 통해 프
                      랑스 세력을 끌어들여 막으려는 시도가 실패하면서 병인박해가 발생하고, 이후 제너럴셔먼호 사건, 병
                      인양요, 오페르트 도굴 사건, 신미양요를 경험하면서 강화된 통상 수교 거부의 의지를 척화비를 세워
                      표방하였어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을 때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음.
                내용 요약  (1) 병인박해(1866)                        ③ 문화재 약탈 후 프랑스군 철수
                      ①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프랑스와의 연대             (4)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에 실패하여 발생
                                                             ①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통상 요구를 거절당하
                      ②  프랑스 신부와 8천 명의 신자들이 순교, 병인             자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
                        양요의 원인이 됨.
                                                             (5) 신미양요(1871)
                      (2)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
                                                             ①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이유로  로저스  제독이
                      ①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군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 침략
                        올라와 통상 요구
                                                             ② 어재연 : 광성보에서 미군 격퇴
                      ②  평양 감사 박규수의 통상 요구 거절 후 폭력과
                                                             ③  흥선 대원군이 전국에 척화비 건립
                        약탈 자행 - 화공으로 침몰시킴.
                      (3) 병인양요(1866)                         (6) 한계
                                                             ①  일시적 침략은 저지하였으나 국제 정세를 제
                      ①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가 전함 7척과
                        6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병인박해를 이유로 강              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개항과 근대화가 늦어
                                                               지는 결과를 가져옴.
                        화부 점령
                                                                                          정답 ①
                      ②  한성근(문수산성),  양헌수(정족산성)가  프랑
                        스군 격퇴
          146   시나공 막판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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